자기개화.
자기개화를 위한 필요조건. 준비요건이라고 하자.
첫째, 충분히 고통받아야 한다.
충분히 고통받기만 하면 다 진화한다고 말하진 않겠다. 이건 너무나 큰 고통 속에서 괴로움을 견뎌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이자 편견이니까.
모든 영웅서사와 신화에서 아직 영웅이 되지 못한 주인공이 백발이 무성한 스승이나 조력자를 만나는 건 다 깊은 이유가 있다.
우리에겐, ‘자기개화’를 일으켜줄 계기가 되는 존재가 필요하다.
하지만 분명 필요조건도 있어야 하고, 그 첫번째는 충분히 고통받는 일이다.
정반대의 상상
자, 그럼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보자.
그냥 상상만 해보자는거다.
이 세상은 물론 따스하고 우리를 사랑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거고 그 자체로 너무나 아낌없이 보살펴줘야 할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한 번 현실과는 정반대의 상상만 살짝 해보자는거다.
전혀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런 정반대의 상상을.
어떤 악마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악마는 우리가 결코 ‘자기개화’를 일으키길 바라지 않는다.
가장 우리 자신다운 모습으로, 우리가 지니고 태어난 예술성과 잠재력을 남김없이 발휘해서 우리가 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이고 눈부신 모습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아주 악독한 놈이다, 이 악마란 놈은.
그러면 이 악마는 무얼 원할 거 같은가.
우리가 스스로 삶에서 주체성을 찾고 원하는만큼 충분히 행복해지는 존재로 진화하는 걸 어떻게든 막고 싶을 거 아닌가.
내 생각에, 이 악마가 선택할 아주 훌륭한 선택지 중 하나는 이거다.
“야, 다 그렇게 살아. 조금만 자세히 보면 너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다? 너 지금 이 현실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해. 누구나 다 그렇게 견디면서 살아가는거야.”
내가 가장 숭고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의미하는 단어도 담겨있고, 실제로 현실 속에서 우릴 위해 건네는 위로와 겹치는 문장도 있지만, 결국 이 악마가 이런 달콤한 멘트로 하려는 건 바로.
당신의 고통이 실은 그리 크지 않은 거라고 당신을 세뇌시키는 일이다.
그러면 결코 인간은 ‘개화’하지 않는다.
뻔한 이야기지만, 매우 중요하고 심오한 이야기다.
인간이 꽃밭에서 샤랄랄라 자신을 개화시키는 경우는 그냥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해변가의 모래알 중 한두개의 극히 희박한 경우를 제외하고, 인간은 결코 충분한 고통 없이는 꽃피우지 않는다.
그리고 좀전에 우리가 상상해보기로 한 그 ‘악마’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니 우리가 가장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사람은, 우리를 보며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 속에 숨어있다.
“야, 다 그러고 살아. 그냥 그렇게 참아가면서 늙어가는거야. 지금 현실에 감사할 줄 알아야지 사람이.”
… 아. 물론 상상 속의 인물이니까 현실에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이야기다.
… 아니라고? 따뜻한 힐링의 감성을 그렇게 매도하지 말라고?
아, 그래서 말했잖아.
그냥 상상 속의 존재라고.
암. 현실은 늘 따스하고 온당하고 사랑과 행복이 넘치니까 그리 염세적으로 보면 안 되지.
다만, 고통 속에서 고통을 있는 그대로 두 눈 부릅뜨고 직면하며 외면하지 않고 감내해내는 사람들을 어리석다 여기지 말길 바란다.
내가 보기에, 부인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고스란히 있는그대로 고통을 겪어내는 자들은, 가장 용기있고 통찰력이 있는 자들이니까.